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인세이]]의 시작과 출가 === 인사의 쇄신을 끝마친 고시라카와인은 고쇼의 확장과 군사력 정비에 나섰다. 홋슈지 미나미도노(法住寺南殿)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의 저택을 옮겨 지은 것으로 궁중의 의식을 치르기에는 비좁다고 하여 닌난(仁安) 2년(1167년) 정월 19일에 새롭게 다시 세웠다. 홋슈지도노는 의식용의 홋슈지 미나미도노와 노리히토 친왕이 거주할 시치조 우에노고쇼(七條上御所), 고시라카와인과 시게코가 거주할 시치조 시타노고쇼(七條下御所) 등으로 구분되어 정치의 중추 구실을 했다. 28일에는 [[로쿠조 덴노]]의 조근 행차가 이루어져 서위나 지모쿠 등의 의식도 이루어졌다. 5월 10일에 고시라카와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장남 시게모리(重聲)에게 도산(東山), 도카이(東海),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등 도(道)의 산적 및 해적에 대한 추토 선지를 내렸다(《효한키》). 이로써 시게모리는 국가적인 군사 · 경찰권을 정식으로 위임받았다. 시게모리는 노리히토 친왕의 황태자 책봉식에서 고시라카와인의 경호를 맡았고, 9월의 구마노 참배에도 동행하는 등 [[헤이케]] 안에서도 고시라카와인과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키요모리는 헤이케의 가독 자리를 [[타이라노 시게모리]]에게 양보한 뒤에도 여전히 큰 발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닌난 3년(1168년) 2월에 병으로 쓰러졌다. 구마노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고시라카와인은 일정을 앞당겨 흰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장 로쿠하라로 문병하러 찾아올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쿠조 카네자네도 >"전 대상국(大相國)의 병환, 천하의 대사가 모름지기 이 일에 달려 있다."(《교쿠요》 2월 11일조) 며 정황의 불안을 두려워했다. 셋칸이 아니면 신하의 병이 쾌유되기를 기원하는 대사면을 내리는 일이 없었지만 고시라카와인은 이례적으로 키요모리의 병이 낫기를 비는 대사면령을 19일에 내리고, 반대파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마쓰도노 모토후사의 간닌 저택에서 로쿠조 덴노의 노리히토 친왕에 대한 양위식을 거행했다([[다카쿠라 덴노]]). 이후 완쾌된 키요모리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후쿠하라(福原)에 별장을 짓고 그곳으로 물러나 살았다. 대상회(大嘗会) 등의 즉위 행사가 끝나고, 새해가 된 닌난 4년(1169년) 정월에 고시라카와인은 12번째 구마노 참배에 나섰다. 2월 29일에는 가모 신사에도 참배했는데, 이러한 행동들은 출가를 앞둔 작별인사였다(《료진히쇼 구전집》). 3월 13일에는 고야 산(高野山)에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인 20일에 후쿠하라의 키요모리의 별장에 들렀는데 이 때에 행해진 천승공양은 이후 정기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연호를 '가오'로 고친 4월에 시게코에게 '겐슌몬인'(建春門院)의 원호를 내리고, 6월 17일에 홋슈지도노에서 출가하여 법황(法皇)이 되었다. 이때 계사(戒師) 등 8명의 승려들은 모두 온죠지(園城寺)의 문도였다. 11월 25일에 새로 즉위한 천황의 야소시마노 마쓰리(八十嶋祭)에서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내 쓰네코(經子)가 칙사역으로서 구교들을 거느리고 로쿠하라로부터 왔다. 고시라카와인은 시게코와 함께 시치조도노에 마련된 관람석에서 행렬을 관람했는데, 이때까지 고시라카와인과 [[헤이케]] 사이의 협력 체제는 튼튼해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